근세의 처형 방법은 사형수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 신중하게 계산되었다
대중문화는 종종 '중세'라는 용어를 잔인하고 가학적인 모든 것의 대명사로 사용하지만 '공포의 극장(theatre of horror)’이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였다. 특별히 제작된 교수대와 처형대에서 사형수의 몸에 가해지는 여러 가지 고통스럽고 잔인한 형별이 가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교수형은 근세 유럽 전역에서 가장 널리 시행된 처형 방법이었다. 그러나 교수형에도 각각 고유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다양한 다른 방법이 있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형벌은 범죄에 합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교수형, 참수, 수레바퀴형, 화형 등의 처형 방식은 주로 죄수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성별에 따라 결정되었다. 고귀한 신분의 범죄자라면 범죄와 상관없이 참수될 것이다. 그가 평민이라면 교수형에 처한다. 그리고 사회 상급자(남편 등)를 살해한 여성이라면 화형에 처한다. 그런 끔찍한 운명은 대체로 명예의 문제였다. 즉, 가족과 그들이 속한 길드와 같은 단체를 고려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가치와 존경의 정도의 문제였다. 명예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고, 행동을 통해 명예를 얻을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공개 처형을 통해 잃을 수도 있었다.
죽음에 이르는 시간
사형 집행에 따른 수치심의 정도는 부분적으로 범죄자가 죽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계산되었다. '죽음의 무기'와 관련된 시간이 길수록 불명예가 커졌다. 따라서 천천히 당겨서 목을 졸라 죽이는 교수형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매우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였다. (긴 줄을 목에 매달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즉시 목이 부러지고 질식시키는 빠른 죽음을 가져다준 ‘긴 방울(long drop)’ 방식은 윌리엄 마우드가 1872년에 발명했다). 숨이 막혀 죽을 때 나타나는 다리 경련은 런던에서 가장 악명 높은 처형 장소의 이름을 따서 '타이번 지그(Tyburn Jig)’로 영국에 알려졌다. 사형수에게 동정을 느낀 사람들은 종종 죽어가는 사람의 다리를 잡아당겨 죽음을 앞당겨주곤 했다.
수치는 자연적인 요소에 의한 죽음에 동반되었다: 불(화형), 흙(산 채로 매장), 물(익사) 또는 공기(올가미에 목이 졸리거나 수레바퀴에 사지가 부러진 채 묶이고 방치되어 천천히 죽는 것). 사형수의 사지를 부러트려 수레바퀴에 결박하는 처형법은 유럽 본토에서 널리 퍼진 관행이었다. 사형 집행인은 각 팔과 다리의 관절 마디를 부수어 수레바퀴 살에 부러진 팔다리를 짜 넣었다. 그런 다음 수레바퀴는 높은 장대에 올려지고, 부서진 몸은 전시되어 새들을 위한 썩은 고기가 되었다. 판사는 사형 집행인의 일격이 ‘아래에서 위로’ 시작하여 사형수를 산 채로 천천히 죽여야 하는지, 아니면 목에 첫 번째 일격을 가해 즉시 죽여야 하는지를 정한다. 느린 죽음인 첫 번째 방법은 가장 극악무도한 살인자들에게 가해졌다. 그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법이었다.
교수형과 마찬가지로 수레바퀴형은 대중의 참여를 허용했지만, 이 경우에는 사형 집행을 연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연쇄 살인범이자 갱단인 아르리고 가베르팅가(Arrigo Gabertinga)가 17세기 초 이탈리아 트렌토(Trento)에서 사지를 부러뜨려 수레바퀴형에 처했을 때,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쓰인 처형곡(execution ballad)에 따르면 지역 사람들이 그가 고통 속에서 3일 동안 살아남도록 음식을 먹였다고 한다.
그에게 더 큰 고통과 통증을 주기 위해,
그의 악행은 너무 많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 3일을 버텼다.
그리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찾아왔고,
그의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고,
그것이 그를 더 큰 고통으로 살게 했다.
대조적으로, 칼이나 도끼에 의한 빠른 참수는 거의 바람직했으며, 독일 땅의 시민도 이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귀족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범죄 그 자체에 따른 처벌법이 있었지만(예를 들어 반역과 이단에는 고유한 처형법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와 성별이 주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여성이 남편을 죽이거나 하인이 주인이나 여주인을 죽이는 것과 같이 사회적 상위자를 살해한 사람은 '사소한' 또는 '작은' 반역죄로서 소역죄(petty treason) 판결을 받았다(그 반대에는 대역죄가 있다). 소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남자는 교수형에 처하지만 같은 범죄를 저지른 여자는 화형에 처했다.
앤 불린(Anne Boleyn, 1536: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생모로 불륜과 이단, 모반 등의 혐의로 처형됐다)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Mary, Queen of Scots, 1587)의 처형은 성별, 계급 및 명예가 어떻게 교차했는지 보여준다. 둘 다 대역죄로 유죄 판결받았지만, 여왕이라는 이유로 참수되었다. 그러한 높은 명예의 여성을 불태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덧붙여, 앤 불린은 영국에서 칼로 참수된 유일한 죄수다. 찰스 1세조차도 도끼로 참수되었다. 헨리 8세는 앤이 참수형이 보통 칼로 행해지는 프랑스에서 자란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칼레에서 사형집행인에게 칼로 의식을 집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녀가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기 전에 그가 집행인에게 명령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수치의 노래
유죄 판결받은 자들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것은 범죄가 아니라 형벌이었다. 처형곡은 인쇄술 초기부터 출판되었다. 기록이 남아있는 가장 초기의 곡은 1504년경 독일의 것이다. 대부분의 근세 대중노래와 마찬가지로 익명이었고, 대부분 그 나라에서 친숙한 선율로 만들었다. 콘트라팍툼(contrafactum)으로 알려진, 잘 알려진 멜로디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이 작곡법은 누구나 즉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가사를 암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늘 매우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값싸게 인쇄된 이 악보는 광고 수단으로 노래의 일부를 부르는 판매자에 의해 번화한 거리와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처형곡은 특히 월터 롤리(Walter Ralegh) 경과 같은 유명한 인물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면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주목할만한 범죄를 저지른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예를 들어, 여성 살인자에 관한 노래는 놀라울 정도로 많다). 1849년에 매닝스에서 벌어진 친구를 살해한 남편과 아내를 노래한 처형곡의 인쇄된 악보 판매에 대한 한 추정치는 250만 장이다. 청중을 선별해 감옥 벽 안에서의 '비공개' 처형으로 전환되면서 처형곡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대안적인 끝
처형곡이 유죄 판결받은 범죄자들이 최후의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지를 암시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분명 수치심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교수대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사형수의 목소리로서 종종 일인칭으로 쓰여 있다. 그는 올가미, 도끼 또는 불꽃을 바라보고 관중들에게 같은 실수를 범해 같은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한다. 노래는 일정하게 수치심을 언급하지만, 범죄보다는 처형과 관련하여 노래의 끝부분에만 나타난다. 1628년 앨리스 데이비스는 남편을 살해한 경미한 반역죄로 유죄 판결받았고 그해 7월 12일 화형을 당했다. 그녀를 위해 쓰인 처형곡 -모든 절망적인 여성에 대한 경고 –에선 그녀의 처형을 언급할 때마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반복한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나는 치명적인 일을 저질렀네.
나를 이 수치심에 이르게 하는 것을.
살인은 '치명적 행위'지만, 그녀의 화형은 ‘이 수치심'이다. 노래의 주인공인 데이비스는 이 수치스러운 죽음이 그녀의 친구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배심원은 나를 불러 세웠고,
심판하기 위해 내게 왔네.
그것은 내 마음에 공포를,
그리고 내 친구들에겐 부끄러움을 주었네.
이 가사는 죽음을 앞둔 누군가가 수치심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를 포착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처형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살아남은 가족에게 전가될 것이며, 이들은 저지른 범죄 때문이 아니라 사용된 방법 때문에 고통을 겪을 것이다. 데이비스가 불에 태워 부끄럽고 공개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녀가 남긴 사람들에게 불행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들은 생계를 잃고, 단체에서 쫓겨나며, 지역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기피를 당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망, 유배 또는 길드로부터 추방당해 남성 가장을 잃음으로써 가족이 궁핍해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국이 선고를 변경할 때 사형을 철회하기보다는 집행 방식을 변경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1684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시의회는 절도 혐의로 붙잡힌 가난한 직조공에 대한 형을 완화했다. 그는 교수형을 받는 대신 참수형을 당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교수형에 처할 예정이었으나, 자녀가 많았기 때문에 자비를 내려 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교수형에 따른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
수치심의 연좌제는 19세기까지 잘 살아남았다. 유죄 판결받은 범죄자의 형량 변경을 요청하는 영국 내무부에 대한 많은 청원은 부끄러운 처형이 죄수와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1825년에 강간으로 유죄 판결받은 제임스 패튼(James Pattern)의 경우, 여러 청원자가 그의 교수형을 완화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범죄로 인해 수감자의 생명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매우 가까운 친척들(일부 농장 소유주)에게 큰 수치와 불명예를 안겨줄 것입니다.’ 분명 패튼의 수치스러운 최후 때문에 그 농장주는 사업을 잃고 고통을 겪을 거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청원은 사형이 아니어도 이루어졌다. 1819년 조셉 굴드(Joseph Gould)가 절도 혐의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두 번이나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받은 형벌이 부끄러워 굴드가 아버지의 생선 장수 사업에 뛰어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우 그녀는 성공했다. 그는 3개월만 복역하고 공개 채찍질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명예는 구했고, 그는 결국 생선 장수가 될 수 있었다.
죽은 자의 명예를 훼손하다
수치심에 대한 두려움은 1752년에 제정된 가혹한 살인에 대한 법령에 영향을 미쳤다. 이 법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모든 사람이 외과 의사가 제정한 공개 해부(해부술로 알려짐) 또는 사슬에 매달아 추가 사후 처벌을 받게 하였다. 시체는 일반적으로 도시 외곽의 눈에 띄는 언덕이나 교차로에 말뚝으로 끌어올린 새장에 넣어 수년에 걸쳐 점차 분해되도록 방치했다. 이 법은 매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형벌에 '특이한 악명'을 추가하기 위한 조치로서 도입되었다.
14세기 후반 이후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자백할 수 있었고, 일반적으로 신성한 땅에 매장되는 것이 허용되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받기 위해선 온전한 몸을 매장해야 했다.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intercession, 代禱)와 정교한 매장 의식에 대한 가톨릭의 초점을 거부한 개신교 종교 개혁조차도 영혼이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시체가 필수적이라는 영국의 대중적인 믿음을 흔들 수 없었다. 해부된 범죄자들의 시신은 결국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1752년에 뉴게이트의 교구장(교도소의 목사)은 '이러한 악인의 시신이 해부되거나 해부될 때까지 기독교인의 매장 특권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러한 해부의 공공성은 온전하지 않은 시체는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사슬에 매달린 시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체가 전시된 기간 동안 신체 일부가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살인죄 법에 대한 대중의 항의는 치안관이 외과 의사에게 전달하기 전에 처형된 친척의 시체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이 교수대에 달려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때로는 타이번(Tyburn: 런던의 사형집행장)에서 전면적인 폭동이 일어나곤 했다.
명예에 기반한 사회에 대한 근대의 개념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실행되었던 광범위한 처형 방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사형 집행에 참석한 각각의 관중은 본질적으로 죽음의 방식과 거기에 이르는 시간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 암울한 지식에 수반되는 수치심이라는 낙인은 당국에 의해 대중이 순종의 삶을 선택하도록 장려하는 데 사용되었다.
* 글쓴이 Una McIlvenna는 근세 유럽의 문학 및 문화사가이자 “죽음의 소식을 노래하다: 1500~1900년 유럽에서의 처형곡”(Singing News of Death: Execution Ballads in Europe 1500-1900. Oxford University Press, 2022)의 저자다.
원문 출처
Una McIlvenna. Violent Ends. History Today. Volume 72 Issue 8, August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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