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고대 로마인들은 음식을 먹고 난 후 다음 코스를 위해 속을 비워 놓으려 재빨리 구토실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만찬실에 인접한 방으로 목구멍을 자극하는 데 쓰는 깃털과 게워낸 것을 받는 대야가 준비되어 있다.
토하는 행위와 관련된 라틴어에는 동사 vomo(구토하다)와 vomito(구토를 계속하다)부터 명사 vomitor(구토하는 사람)과 토하는 실제적 행위 혹은 구역질 나는 것의 뜻도 될 수 있는 vomitus와 vomitio까지 다양하다.
구토실(보미토리움, vomitorium)은 분명 이러한 의미의 일부가 분명하지만, 고대 원전에는 실제로 식사를 한 후 토하는 장소를 설명하는 단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기원후 5세기에 쓰인 마크로비우스의 <농신제(Saturnalia)>에 처음 등장한다. 마크로비우스는 여흥을 즐기는 공공장소에서 관객들이 자기 자리로 “쏟아져 들어가는” 통로를 지칭하기 위해 복수형 vomitoria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Vomitorium / vomitoria는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건축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구토실이 구토하는 곳이라는 오해는 대중문화에 널리 퍼져있다. 이런 신화가 어떻게 생겨났고, 왜 이리 끈질기게 이어져가고 있는 걸까?
구토의 역사
1929년 올더스 헉슬리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에서 구토실은 구토하는 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처음 오용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헉슬리 이전의 신문과 저널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그들은 구토실이 통로인지 속을 게워내는 공간인지에 대해 혼란을 보여준다.
1871년 영국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사에서 프랑스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펠릭스 피아트(Felix Pyat)는 명절 식사를 “역겹교 이교도적이며, 괴물 같은 향연- 구토실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로마의 축제”라고 썼다. 1871년 경에는 이미 구토실은 구토하는 공간으로 오해되어 있었다.
바로 같은 해에 영국 작가 오거스터스 헤어는 <로마의 산책(Walks in Rome)>을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팔라티네의 플라비아 궁전에 만찬실과 인접한 방이 다름 아닌 구토실이라고 추측하며, 그는 이 방을 “로마인의 역겨운 기념비”라고 묘사했다.
이에 대해 1888년 새터데이 리뷰(Saturday Review)에서 익명의 비평가는 “유쾌한 실수”로서 구토실에 대한 헤어의 실수를 지적했다. 비평가는 로마 고고학은 결국 아마추어가 다루기에는 너무 기술적인 주제라고 경고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도 빠질 수 없다. 1927년과 1928년 두 차례에 걸쳐 로마 축제와 구토실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중 하나는 저명한 역사학자 윌 듀란트(Will Durant)의 저서 <문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1929년 헉슬리의 소설이 출판된 무렵에는 로마 파티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구토실은 대중의 상상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탐욕스러운 황제들
구토실이란 발상은 어디서 나온 걸까? 헉슬리의 소설은 로마시대의 정치가인 페트로니우스가 기원후 1세기에 쓴 <사티리콘(Satyricon)>에서 나오는 터무니없는 식탐에 관한 이야기에서 암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페트로니우스의 소설은 구토실을 다루지 않는다. 단지 한 등장인물이 저녁 식사 동안 대변을 볼 때 통증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식사와 구토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 역사>와 수에토니우스의 <카이사르의 삶에 관하여>에서 제국주의적 과잉에 대한 추악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서신 비서였던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항상 음식과 포도주로 배가 가득 차도록 식사를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엎드려서 깃털을 목구멍에 넣어 뱃속의 내용물을 게워냈다.
클라우디우스의 과식은 하루에 4번 만찬을 벌였다고 전해지는 황제 비텔리우스에 비하면 초라하다. 비텔리우스는 꿩의 두뇌와 홍학의 혀 등 엄청난 식욕을 채우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조달했다. 그는 다음 연회의 음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식사 후 구토를 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통치를 위한 개인의 적합성에 대한 점을 논의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포함시켰다. 탐욕과 탐식은 쾌락에 빠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을 나타낸다. 클라디우스와 비텔리우스 둘 다 연회에 빠져 공무를 포기했다고 전해진다.
수에토니우스는 클라디우스가 인근 신전에서 피어 나오는 음식 냄새를 맡고 연회에 참가하려 법정을 떠났다고 주장한다. 제사를 주재할 때 비텔리우스는 제사 고기와 빵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고 한다. 이 두 예 모두 탐식으로 인한 직무 태만이다. 구토란 말 그대로 제국의 부를 내던지고 있는 황제에 대한 방탕과 낭비의 궁극적인 징조였다.
음식에 관한 도덕과 현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일화에 담긴 도덕적 메시지를 이해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로마인이라면 자신의 배만 불리는 게 아니라 신, 가족, 그리고 국가에 헌신해야 한다. 과식은 내면의 도덕적 해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철학자 세네카는 로마인들이 기본적인 식량과 음료 이상을 원한다면, 그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악덕을 충족시키는 거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그는 이국적인 요리에 돈을 쓰는 사람들을 특히 비판했다.
“그들은 먹을 수 있게 토하고, 토할 수 있게 먹습니다. 그들은 지구 전역에서 모은 요리를 소화할 가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비텔리우스와 클라디우스의 이야기에서 처럼 이 말은 대부분의 로마인에게는 해당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실제 구토실이 그런 퇴폐적 관행을 위해 따로 마련되어 있었던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인 비판이다.
구토는 사실 로마 세계에서 의학적 치료로 더 흔했다. 켈수스는 구토가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그것은 사치스러운 징표였기 때문에), 건강상의 이유로 위를 비우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형용사 vomitorius/a/um은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 구토제(emetics)를 기술하는 데 사용하였다.
로마의 주민 대부분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식단은 주로 곡물, 콩류, 올리브유, 와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만으로 그들의 육체노동의 삶을 버텨야 했다. 비텔리우스가 엄청난 식욕을 채우기 위해 먹어치운 제사 음식은 로마 시민이라면 기쁘게 맛을 음미했을 것이다.
그런 음식들은 세심하게 관리되었다. 종교 축제에서도 최고의 제사 고기는 귀족 참가자를 위해 남겨두거나 했지만, 서민에게는 나눠주지 않고 팔았다. 로마인들에게 제공한 유명한 “곡물 수당”은 사실 백만 명이 넘는 로마 거주자들 중 단지 15만 명의 자격을 갖춘 시민들에게만 국한된 특권이었다. 음식은 특권이었다.
물론 마크로비우스 자신이 사용한 보미토리아(vomitoria)란 어는 구토와 연관되어 사람들을 뿜어내는 원형경기장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고대 문헌에서 발견된 건축학 용어와 구토하는 로마인들 사이의 연관성은 보미토리움(vomitorium)을 19세기의 상상 속에서 토하는 방으로 오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과식하는 사람들은 사치와 타락으로 널리 알려진 로마인과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구토실에 대한 신화는 식사 중에 게워내는 것을 좋아한 방탕한 황제와 부유층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만들어졌다. 예로부터 우리는 과식을 도덕적 해이의 징표로서 들어왔고 비판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었다.
구토실과 같은 암시적인 단어를 그런 타락과 관련 있는 방으로 해석(오역)한 것은 일어나기 쉬운 실수였다. (번역 김명호)
* 원문을 일부 편집하여 번역했습니다.
* 번역 원문: https://theconversation.com/mythbusting-ancient-rome-the-truth-about-the-vomitorium-7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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