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채식주의는 주로 동물 복지에 관한 것이지만, 그 기원은 과도한 식욕을 억제함으로써 영성을 고취하려 했던 근대 초기에 발견된다
1세기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크가 저술한 <육식에 관하여(De esu carnium)>의 영어 번역본은 1603년에 ‘육식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폭력에서 시작된다’란 제목으로 필레몬 홀랜드(Philemon Holland)가 번역해 출판했다.
“당신은 내게 왜 피타고라스(1)가 고기를 먹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경이로움을 느낍니다…살해된 생물에게 입을 댄 사람은 어떤 동기와 이유가 있었을까요…불쌍한 짐승들이 찔리거나 목이 잘리고 도살되고 토막 난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의 눈은 그런 살인과 학살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그의 코는 어떻게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견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의 미각은 그 끔찍한 상처와 궤양, 혹은 치명적인 상처에서 나오는 피와 체액을 받아들일 때 공포로 완전히 망가지고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홀랜드는 책의 서문에서 플루타르크의 작품이 동물 권리를 옹호하는 논쟁적인 글이 아니라고 주의 깊게 부인했다. 그는 오히려 이 젊은 철학자가 자신의 토론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수사학을 연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홀랜드는 이 작품에 도덕적 의도가 있다면, '플루타르크가 겨냥한 것은 그의 시대에 모든 척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동물성 식품의 공급, 구매, 소비에 있어 과잉과 낭비를 줄이고 축소하자는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플루타르크는 육식을 하지 않는 식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지나친 탐닉을 반대했다고 홀랜드는 말한다.
홀랜드가 플루타르크의 작품을 동물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17세기 초 영국 사람들에게 채식주의, 즉 ‘육식의 기피’가 어떤 의미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 근대인에게 육식은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동물은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를 상징하는 의미에서만 중요했다. 따라서 17세기 육식의 기피는 오늘날 고기가 없는 식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현대 채식주의 역사의 일부다.
홀랜드가 플루타르크의 에세이에서 윤리적 관점을 무시한 것은 단순히 그것이 성경의 명령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식인들은 그리스와 로마를 인류 문명의 정점으로 생각했지만, 고전 사상이 기독교적 사상과 항상 편히 어우러진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고대 세계와 관련된 초기 근대의 흔한 문제였다. 창세기 1장 29~30절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말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풀과 씨를 가진 모든 나무를 주었으니, 그것이 너희의 식물이 되리라 / 또한 땅 위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 곧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는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었노라: 그리하여 그대로 되었느니라."
홍수 이후에야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했다. 창세기 9장 2절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했다: "움직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을 것이 되리니, 내가 너희에게 준 푸른 풀과 같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 따라서, 동물을 먹는 것은 허용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타락의 산물이었으며, 인류가 타락한 증거이기도 했다.
육식과 타락 사이에는 이러한 연관성이 있지만, 육식을 피하는 것이 기독교의 미덕으로 간주되진 않았다. 실제로, 17세기 초 한 성직자는 자신의 신학과 관련하여 완전히 논리적인 방식으로 육식을 제시했으며, 이는 플라타르크가 죽은 동물의 ‘끔찍한 상처와 궤양’에 초점을 맞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1617년에 출판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지도(Mappe of Mans Mortalitie)'에서 청교도 목사 존 무어는 육식이 선한 기독교인에게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플루타르크를 읽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연관성은 있어 보인다. 무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스스로 마모되는 옷과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을 닳게 한다. 삶을 살수록 살날은 더 적어지고,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 그래서 (거울을 보는 것처럼) 우리의 음식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접시에 손을 올리고 취하는 것은 죽은 것의 음식이 아닌가. 그것은 짐승이나 새, 또는 물고기의 살이며, 우리는 그 음식으로 우리 몸을 채워나가다가 결국 그 몸도 벌레의 먹이가 된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보고, 매일 느끼고 맛보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우리의 이 사이에서 느끼지만, 우리는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육식에 영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인간은 항상 부패(타락)해 가며, 이를 인식하려면 자신의 내재한 죄성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안에 내재한 부패의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 고기의 가치다.” 무어는 잠재적으로 부끄러울 수 있는 인간의 측면(먹이를 먹어야만 하는 짐승으로서 우리)을 매일 전능자를 묵상하는 계기로 전환했다. 그 어떤 짐승도 그런 묵상을 할 수 없으므로 무어는 인류가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동물을 먹지 않는 것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자아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기회에서 물러나는 것이며, 육식을 피하는 것은 불멸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플루타르크와 달리 무어는 동물을 동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이 우리 음식으로서 존재한다고 해서 인간의 지배와 비인간 동물의 복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물은 인간이 해석해야 할 신성한 징표다. 짐승은 우리에게 음식으로 제공되지만, 상징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 플루타르크의 에세이가 동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과도함에 대한 도전이라는 홀랜드의 제안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 고전 철학자는 동물의 입장을 다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육식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을 ‘읽으려는’ 충동은 단순히 지나친 방종이라는 문제보다 더 큰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기독교인의 불멸의 영혼에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근대 초기 영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선한 기독교인이 자연계를 연구함으로써 신을 이해하는 데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개인이나 종의 지위를 다루는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무로도 간주하였다. 청교도 목사 에드워드 톱셀은 그의 미완성 작품인 <천국의 새들>(1613~14년경)에서 자신의 집필 동기가 경건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책에서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말씀을 이해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추론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가르치는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이해하는 동물학 텍스트가 아니라 초기 근대 저자들이 생각한 동물학이며, 신에 대한 계시를 제공한다.
이런 맥락에서 동물 보호에 대한 윤리적 논의가 육식 기피와 마찬가지로 드물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동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소는 가족의 안녕에 필수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정서적 교감을 반영하지는 않더라도 소를 돌보는 것은 필요했다. 오히려 이 시기에 동물 복지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인쇄물은 종종 실제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직자 존 롤린슨은 1612년에 잠언 12장 10절(‘의로운 사람은 짐승의 생명을 생각하나니’)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 구절의 의미를 재빨리 제한했다. 그는 이 구절이 ‘비유’이며, ‘문자 그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즉, 실제로 동물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롤린슨은 계속한다. ‘의로운 사람이 짐승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점은 사람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동물에 대한 친절은 인간을 향한 진정한 친절의 모델일 뿐이다. 이것은 동물 복지에 대한 개념으로 계속해서 반복해 등장한다. 1609년 설교에서 톱셀은 ‘우리의 양 떼와 염소 떼는 우리의 가족이다’라고 말하면서 ‘부모는 양 떼인 아이들을 보살피고, 자녀는 부모를 보살핀다’라고 우화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목자라고 해서 양 떼가 실제 양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윤리를 고려할 때 동물 복지를 무시하는 논리가 당시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생각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고기가 없는 식단을 채택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긴 최초의 근대인들에게 육식을 회피하는 것은 동물 복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었다. 존 무어가 자아 성찰을 위해 육식으로 눈을 향했다면, 토마스 부셸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식을 외면했다.
부셸은 재무장관이자 근대 과학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프랜시스 베이컨 경의 하인이었다. 1621년에 베이컨이 뇌물 수수 혐의로 탄핵당하자 부셸은 3년 동안 은거하면서 고독한 생활을 하였고, ‘대홍수 이전의 장수한 아버지들처럼 기름, 꿀, 겨자, 허브, 비스킷, 그리고 오로지 물’이라는 금욕적인 식단을 실천했다. 그의 육류가 없는 식단은 타락하기 전 순수했던 시대로 돌아가려는 시도였다. 고기를 먹지 않는 엄격한 자기 부정은 도덕적이며 존경받는 집단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동물의 고통에 대한 우려는 그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성경에 제시된 자신의 정화를 향한 여정이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의도한 것보다 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듯하지만, 부셸은 1628년 자서전에서 ‘육신에 사는 자는 영적으로 죽는다’(육체적 욕망과 쾌락에 집착하는 삶이 영적인 죽음을 가져온다는 의미)는 로마서 서신을 인용했다.
부셸은 ‘모든 배신적인 감각이 가장 즐거워하는 대상을 부정하고 싶다. 나는 식욕을 만족시키는 어떤 것도 먹지 않았고, 이전에 좋아했던 어떤 것도 기꺼이 바라보지 않았으며, 내 정념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생물도 동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금욕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종교적, 시민적 행동 규범 내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육식을 피하는 것은 사회적 위협이 아닌 개인적 선택으로 볼 수 있었다. 1655년 팸플릿을 인용하면 ‘무해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식하지 않는 식습관을 통한 자기 정화는 17세기 초 영국의 안정성에 도전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말들이 세례를 받고 기병이 자기 엉덩이를 먹는 등(영국 내전과 같은 기시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사회적으로 큰 격변의 시기였기 때문에 육식을 피하는 것은 단순한 식단의 선택보다는 더 음습한 면이 있다고 여겨졌다.
육식 거부의 위험성은 영국 내전이 한창이던 1646년에 토마스 에드워즈는 “괴저: 이 시대 이단자들의 많은 오류, 이단, 신성 모독 및 해로운 관행들의 목록과 발견”에서 혼란이 만연하던 시기에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상들을 나열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가 발견한 오류 중에는 ‘하나님은 땅 위에서 기는 생물들을 가장 성스러운 성인들만큼 사랑하시며, 인간의 살과 두꺼비의 살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생각, ‘전혀 싸우지 않거나, 어떤 사람이든,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기 위해 닭과 같은 생물을 죽이는 것은 불법’이라는 생각, ‘어떤 종류의 피든지 먹는 것은 불법이며, 블랙 푸딩과 같은 음식은 불경스러운 음식”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견해들을 현 상태에 대한 ‘괴저성’ 공격으로 여겼으며, 이는 자연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우월성을 부인하는 것은 신이 정한 위계질서를 뒤엎는 것이며, 이에 따라 혼란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이 그 증거였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점은 심지어 '디거'(Digger)(2) 운동의 지도자인 제라드 윈스탠리도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649년에 발행한 팸플릿 <진정한 레벨러스(Levellers)(3)를 위한 기준을 세우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태초에 위대한 창조주 이성은 지구를 만들어 짐승, 새, 물고기, 그리고 이 피조물들 다스리는 주인인 인간을 보존하기 위한 공동의 보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야수들의 왕)가 이성과 정의, 올바름의 영보다 창조의 대상들에 더 많은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 그때 마음의 어둠과 마음의 약함에 빠져들었고, 스승과 통치자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기적인 상상력이 다섯 감각을 장악하고, 이성의 자리에서 왕처럼 통치하며, 탐욕과 함께 작용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지배하게 했다; 그 결과 영은 죽고 인간은 속박에 빠졌다."
윈스탠리는 창세기의 서사를 따르고 있다. 창세기는 타락 이전의 평화로운 인간 통치와 타락 이후의 육식과 부패를 보여준다. 그러나 윈스탠리의 경우 창조 서사와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는 ‘인간의 살’이 ‘창조의 대상’에 기쁨을 느끼는 것, 즉 동물을 먹는 것이 사람들의 노예화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타락이 해소되는 이상적인 세계로서 디거를 설명하면서도 윈스탠리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1652년 '자유의 법칙'에서 '모든 공공 낙농장은 버터와 치즈의 저장소이며, 모든 가족은 자기 집 주변에서 자기 소를 기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시기에는 (지금도 종종 그렇듯) 치즈가 레닛(rennet)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젖을 먹는 어린 송아지의 위 주머니'로, 1631년 저바이스 마크햄이 설명했다. 따라서 윈스탠리가 디거의 천국에서 제시한 식단은 동물을 죽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인간 계급에 대한 도전은 급진적이지만, 동물의 노예화(그의 용어)라는 일반적인 자연 질서를 받아들인다. 부셸의 잃어버린 순수함이란 개념을 되풀이하면서도, 그는 무어의 육식에 대한 평가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17세기에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 연구를 제공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로저 크랩 (Roger Crab)은 버킹엄 셔 (Buckinghamshire)의 잡화상이었다. 1655년 팸플릿에 따르면 그의 '지속적인 음식'은 '채소와 허브, 양배추, 순무, 당근, 녹나무 잎, 그리고 풀; 또한 버터나 치즈 없이 빵과 밀기울(밀에서 가루를 빼고 남은 찌꺼기)’이었다. '영국의 은둔자'라는 제목의 팸플릿은 크랩이 부셸처럼 자신을 금욕주의자, 인식 가능한 종교적 인물로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육식하는 것은 순수한 본성의 절대적인 적이며, 순수한 본성은 순수한 신의 작품이고, 타락한 본성은 악마의 감독하에 있다’고 썼다. 부셸처럼 크랩도 자신을 타락시키지 않기 위해 동물을 먹는 것을 거부했다.
크랩은 자신의 식단에 관한 새로운 신학적 이유를 제시했다. 창세기에 따르면, 그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이후, 세상이 물에 잠기고 땅 위에 과일과 채소가 없어지자, 인간은 방주에서 나온 피조물 고기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인식했다. 홍수로 인해 아담과 이브를 먹여 살렸던 식물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육식은 실용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졌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선사시대 아벨이 왜 양을 키웠는지 궁금해진다.)(4) 홍수 이후 동물의 소비는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과 ‘채소와 무해한 음식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짐승이나 짐승의 살과 비교해 쓰레기라고 부르며 경시했으니, 이로써 육체를 파괴하는 영들과 천사들이 우리를 더 가까이하고 인간을 자주 찾아왔다”고 했다. 육식은 원죄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크랩에게는 인류의 파멸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채소, 잎, 풀로 이루어진 식단은 사탄의 ‘파괴하는 영들과 천사’들로부터 벗어나 더 순수한 존재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동물 복지는 동기가 아니었다.
그 당시 크랩과 그의 식단이 유명해진 것은 당시 영국 음식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팸플릿의 제목 페이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이 시대의 경이’가 되었으며, 자신이 쓴 것처럼 ‘국가가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다. 주목의 대상으로서 그의 지위는 무어의 작품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고기가 묵상을 위한 귀중한 자극제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이제는 고기를 피하는 사람이 경고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크랩의 서문에서 육식을 거부하는 걸 ‘무해한 실수’로 보았던 익명의 인쇄업자는 크랩의 추종자 중 한 명에 대해 독자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로버트 노우드 대위가 로저 크랩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의 의견에 동조하여 똑같은 식단을 따르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썼다. ‘남의 위험에서 조심을 배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여기에서 위험은 저주가 아닌 굶주림이었을 것이지만, 그 경고는 여전히 무게가 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육식하지 않는 사람이 동물의 삶에 대해서도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식단과 동물 복지 사이의 이런 연관성 덕분에 현대의 사회 정의 운동으로서의 채식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다. ‘채식주의’라는 용어는 1842년에야 만들어졌다. 순수함에 대한 담론에 갇혀 있던 부셸의 선택은 개인적인 것이었고, 사회 질서에 도전하지 않았다. 크랩은 단순히 ‘가장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경이’로 선언되었기 때문에 사회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토마스 트라이언의 글에서는 다른 점이 드러난다. 트라이언은 1691년 저서 <지혜의 명령>에서 독자들에게 ‘폭력과 억압 없이 얻을 수 있는 음식은 항상 삼가라…모든 열등한 피조물은 상처를 입으면 울부짖으며 그들의 조물조 또는 위대한 근원에게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을 알라’고 조언했다.
문학 평론가 나이젤 스미스는 트라이언을 ‘18세기 채식주의 정전의 중추’라고 표현했으며, 그의 저작은 육류 섭취에 대한 논의를 조셉 라슨, 윌리엄 카워드, 퍼시 비시 셸리, 헬리 솔트 등의 작품으로 이어졌고 오늘날의 채식주의 운동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트라이언은 그를 만든 사상의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 그의 작품에서 타락이라는 개념이 지속해서 나타난다. 그는 ‘무절제함’이 ‘동족과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한 모든 억압의 원인이며, 그들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불결하고 더러운 체액을 생성한다’고 썼다. 여기서 트라이언은 동물의 살과 피를 먹는 것에 초점을 맞춘 존 무어, 육식이 인간에게 타락한 ‘불결하고 더러운 체액’을 생성한다고 믿는 부셸과 크랩, 그리고 이를 억압과 연결한 윈스탠리를 한데 모은 듯하다. 또한 그는 동물 역시 육식 소비의 세계에서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 채식주의가 육식 기피자뿐만 아니라 육식을 묵상으로 이용한 사람들, 동물을 은유로 사용한 사람들, 일시적인 금식자들, 은둔자들, 경이로운 인물들을 포함한 이상하고 예상치 못한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저자 에리카 퍼지(Erica Fudge)는 스트라스클라이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다.
-원문-
Erica Fudge. The Rise of the Flesh-Avoiders. History Today. Nov 2017.
-각주-
(1) 피타고라스는 채식을 주창했던 초기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영혼이 윤회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영혼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을 먹는 것은 동료를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을 근거로 그는 육식을 거부했다.
(2) 디거(Digger)는 17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회적 운동의 일원을 지칭하는 용어. 이 운동은 제라드 윈스탠리(Gerrard Winstanley)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주로 1649년경에 활동했다. 디거들은 땅과 자원이 공동으로 소유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개인 소유권과 상업적 농업에 반대했다. 이들은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추구했으며, 특히 농지를 공동으로 경작하고 그 수익을 공동체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것을 주장했다. 디거 운동은 영국 내전과 그 이후의 혼란한 시기에 발생했으며,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디거들은 당시의 사회적 계층 구조와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했으며, 그들의 이상은 후에 사회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3) 레벨러스(Levellers)는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 기간과 그 이후에 활동한 급진적인 정치 운동으로,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추구했다. 이들은 모든 자유로운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장하고, 불평등한 토지 소유와 권력 구조에 반대했다. 레벨러스는 국가 권력의 남용에 반대하고, 법 앞의 평등, 자유로운 언론, 종교의 자유 등을 지지했다. 그들의 이름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평준화'(levelling)하려는 그들의 목표에서 유래했다. "True Levellers"는 이 운동의 더 급진적인 분파를 나타내며, 특히 제라드 윈스탠리와 같은 인물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레벨러스의 기본 원칙을 더욱 극단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 했다. 레벨러스는 정치적 평등과 개인의 자유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 디거스는 경제적 평등과 공동체주의에 더 큰 강조를 두었다. 디거스는 레벨러스의 원칙을 더 급진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4) 저자는 홍수로 과일과 채소가 없어져서 육식한 것이라면 홍수 이전에는 왜 양을 키웠는지에 대해 모순된 논리를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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