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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과학-과학사

누가 카할의 그림을 훼손했나

by 명랑한 소장님 2022. 2. 28.

1873년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카밀로 골지는 일명 ‘골지 염색법’을 이용해 최초로 신경세포의 구조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 방법으로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각각이 독립된 구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논쟁이 오가던 가운데 마침내 1888년에 스페인의 실력파 해부학자이자 재능있는 화가이며 또한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ón y Cajal, 1852-1934)은 까다로운 골지 염색법을 개선해 전례 없는 세밀한 묘사로 뉴런을 그려냈고, 신경세포들이 서로 분리된 개별적인 독립체임을 증명했다. 골지와 카할은 1906년에 신경계 구조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지만, 골지는 끝까지 뉴런이 독립적인 세포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카할이 그린 뉴런 그림들은 신경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과 영감을 주었는데, 이렇게 귀중한 그림들의 한 가운데는 눈에 거슬리는 도장이 찍혀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카할의 그림을 훼손한 것일까? 이 도장 만행(?) 사건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페드로 만자노(Pedro Manzano)라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만자노는 한 연구소 건물의 하급 관리인이었다. 1945년에 연구소 소장은 그에게 카할의 유물을 수집하고 목록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만자노는 전시 큐레이션에 대한 경험이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 말고 이 업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당시 카할의 그림은 연구소 전체에 흩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무단으로 가지고 나갔다. 만자노는 연구소를 비롯해 스페인의 여러 지역에 걸쳐 흩어져 있던 카할의 그림과 장비들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수많은 카할의 그림을 수집할 수 있었고, 만자노는 당시 관례에 따라 수집한 그림들의 한 가운데에 도장을 찍었다. 

 

당시 국립중앙도서관과 대학에서는 분실과 도난을 막기 위해 책과 그림 등의 페이지 중앙에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만약 측면에 도장을 찍으면 그 부분을 잘라버리거나, 가려서 훔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할의 작품에 찍힌 도장은 스페인 격동의 기간에 후세를 위해 작품을 보전하려 애썼던 이의 헌신의 표시였다. 이제 도장은 카할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출처

https://www.quantamagazine.org/why-the-first-drawings-of-neurons-were-defaced-2017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