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솔로몬 웰컴(Henry Solomon Wellcome)의 생애 초기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는 부모님의 여정을 따라 어린 시절을 다코타 인디언들 사이에서 보냈다. 그의 가족은 내전 직전인 1859년에 미네소타 주 가든 시티에 정착했다. 웰컴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수 족 반란(Sioux Uprising)이라고 알려진 다코타 분쟁이 발발했고, 그는 성인들과 함께 정착지를 방어해야 했다. 분쟁에서 유럽인 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웰컴의 어린 시절 경험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 대한 평생의 동정심을 심어주었다. 훗날 그는 그러한 부족들의 이야기인 <메트라카틀라 이야기(Story of Metlakahtla)>를 저술했다. 그는 분쟁 중에 의사였던 삼촌을 도와 부상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으며, 그 때문에 의약 제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수 있다.
웰컴은 학교를 다니면서 화학과 약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5세 때 약국에서 의약 사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고등 교육을 받도록 영감을 준 윌리암 워랄 메이요(William Worrall Mayo) 박사를 만났다. 웰컴은 필라델피아 의화학 학교( Philadelphia School of Pharmacy and Chemistry)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이주해 여러 제약사를 일했다. 또한 그는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페루인들의 숲을 방문해 기나(cinchona) 나무를 재배하는 법을 배웠다. 이 나무의 껍질은 퀴닌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 물질은 당시에는 말라리아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였다. 몇 년 후, 그는 런던으로 가서 야심에 찬 미국인 실라스 버로스(Silas Burroughs)와 회사를 설립했다. 버로스는 얼마 후 사망했지만 노력은 성공적이었고, 웰컴은 계속해서 회사를 성장시켰다. 그는 디자인, 브랜딩 및 마케팅 기회에 대한 예리한 눈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오늘날 우리가 기초 연구라 부르는 것의 중요성도 이해했다. 그는 연구의 자유가 과학적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의도적으로 직원들에게 새로운 치료법과 다른 생물학적 약제(biological products)를 조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1896년에 그는 특히 열대 질병 치료를 위한 치료 물질을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약용 및 기타 식물에 대한 연구와 연구를 담당하는 특수 화학 실험실을 설립했다. 웰컴 생리학 연구소(Wellcome Physiological Research Laboratories)로 알려진 그의 회사는 면역학, 약리학 및 유사한 주제의 분야에 기여했다. 그의 노력에 대한 결과 중 하나는 압축된 형태로 약을 조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웰컴의 연구실에서 나온 다른 의학적 혁신으로는 파상풍과 디프테리아에 대한 의약품과 백신, 히스타민 분리, 인슐린의 표준화 등이 있다.
그의 재산이 증가함에 따라, 수집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일찍부터 웰컴은 오래된 지도책과 주석박(tin foil)을 수집했지만, 나중에는 런던에 있는 그의 집에 약상자, 오래된 원고와 책, 장식용 꽃병, 예술과 조각품, 양탄자와 해군 기념품, 기타 작은 골동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그는 런던, 영국, 인도 등의 경매에서 이러한 것들을 구입했다.
수집에 대한 관심 분야가 계속 확장되면서 자신의 집 만으로는 호기심을 담아둘 수 없었다. 그는 수집한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그가 수집품을 인수한 비용은 대영 박물관보다 더 컸고, 그의 총 소장 규모는 루브르 박물관보다 몇 배 더 컸다. 때때로 그는 약국과 그 안의 물건 전체를 구입했다. 그는 의학이 주된 역할을 하면서도 다른 많은 주제를 포함하는 인류사 박물관을 설립할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웰컴은 1913년 여름에 런던에서 제17회 국제 의학회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박물관을 개장하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박물관은 1913년 6월부터 9월까지 문을 열었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공간 부족은 지속적인 문제였다. 그곳은 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작업할 공간은 거의 없었다. 확장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박물관은 내내 열려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제3회 의학사 국제회의의 본부 역할을 하였고, 메리 여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공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웰컴은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수집을 계속했다. 1932년에 박물관은 대영 박물관 근처의 더 큰 건물로 이전했다.
1936년에 사망한 웰컴은 그의 회사를 의료 과학 분야를 위한 신탁에 맡겼는데 오늘날 의학 연구 위원회를 통해 영국 정부보다 연구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다. 그러나 박물관은 더 복잡한 노력이 필요했다. 원래 월컴은 이 박물관을 의학사 박물관으로 구상했지만, 그의 수집품은 그 이상이었다. 여기에는 민속지학적 수집품, 다양한 시대의 고고학적 수집품, 선박 모형, 무기, 철문 및 여러 물건들이 있었다. 그의 사망 직후 발간된 대략적인 카탈로그에는 “민속지학적 수집품 1100점, 그리스-로마 및 기타 고대 수집품 100점…여러 소형 무기 80점, 선사시대 수집품 150점, 액자 그림 300점… 수술도구 85점… 막자사발과 막자 60점, 페루 수집품 170점… 도량형 수집품 74점”이 실려 있었다. 박물관은 의학사에 주력하기로 하고 나머지 수집품은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박물관은 5톤 분량의 오래된 사진첩과 폐지, 3톤의 낡은 강철 금고문, 2톤의 썩은 나무 등 수많은 유물을 판매, 기증 및 폐기했다. 2천 권의 문고판 소설은 적십자사에 보내졌다. 낡은 소총은 실제로 2차 세계 대전 중에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박물관에서는 <건강과 질병의 선사시대인>, <영연방 원주민의 의학> 등 다양한 전시회를 열었다. 오늘날 그의 유산 중 가장 값지고 중요한 것은 런던의 웰컴 컬렉션에 있다. 또한 디지털로 살펴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구제 불능의 호기심”을 위한 완벽한 약이 될 수 있는 경이로운 수집품이다. (번역 김명호)
-번역 원문-
https://daily.jstor.org/the-wellcome-collection-perfect-medicine-for-the-incurably-cu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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